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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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는 1744년 프로이센 왕국에서 태어난 독일의 철학자, 신학자, 문학 비평가이다. 그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에서 임마누엘 칸트의 제자가 되었으며, 요한 게오르크 하만의 영향을 받아 독창적인 사상을 발전시켰다. 헤르더는 루터교 목사로 활동하며 문학 비평, 언어 철학, 역사 철학 분야에서 중요한 저작을 남겼다. 그는 독일 민족주의와 문화 상대주의의 선구자로서, 언어와 문화의 관계, 역사와 민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헤르더는 괴테와의 만남을 통해 독일 문학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사상은 19세기 이후 철학, 언어학, 인류학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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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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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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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
로마자 표기 | Johann Gottfried Herder |
출생일 | 1744년 8월 25일 |
출생지 | 프로이센 왕국 모롱 |
사망일 | 1803년 12월 18일 |
사망지 | 신성 로마 제국 작센바이마르 공국 바이마르 |
종교 | 기독교 |
학력 |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
철학적 배경 | |
주요 관심사 | 언어학 언어 철학 문화인류학 심리철학 미학 역사철학 정치철학 종교철학 |
학파/전통 | 계몽주의 반계몽주의 낭만적 민족주의 반식민주의 세계시민주의 질풍노도 바이마르 고전주의 역사주의 낭만주의 해석학 고전적 자유주의 |
주요 사상 | 사고는 본질적으로 언어에 의존한다. 목적론적 역사관 문화 상대주의 민족정신 문화적 민족주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경험적 접근 |
학문적 지도교수 | 임마누엘 칸트 |
기타 | |
영향 |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빌헬름 폰 훔볼트 구스타프 슈바프 야코프 그림 빌헬름 그림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활동 | |
직업 | 철학자 신학자 시인 |
2. 생애
프로이센 왕국 모룬겐(현재 폴란드 모롱크)의 가난한 가정에서 1744년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사였으며, 헤르더는 아버지의 성경과 노래책(songbook)을 통해 스스로 공부했다. 1762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에 입학하여 임마누엘 칸트 밑에서 배웠고, 동시에 세속적 이성의 주장에 비판적이었던 요한 게오르크 하만의 영향을 받았다.[19] 이러한 지적 배경 속에서 헤르더는 독일 정치 사상에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1764년 루터교 목사가 되어 리가에서 교사로 활동하며 첫 주요 저작인 문학 비평 관련 글들을 썼다. 1769년에는 프랑스 낭트와 파리를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고, 이는 그의 저작 활동과 자아 인식에 영향을 미쳤다. 1770년 스트라스부르에서는 젊은 괴테를 만나 독일 문학의 폭풍과 열정 운동이 시작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1771년 뷔케부르크에서 수석 목사 겸 궁정 설교자로 일했다.
1776년, 이미 명성을 얻은 괴테의 도움으로 바이마르 궁정의 총감독직을 맡아 활동했으며, 이 시기 그의 관점은 고전주의로 변화했다. 1773년 다름슈타트에서 마리아 카롤린 플락스란트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다.
만년에는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여 동시대 많은 지식인들과 갈등을 겪었으며, 스승이었던 칸트의 철학을 비판하는 저술을 발표하며 고립되기도 했다.[20] 1802년 바이에른 선제후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아 이름에 '폰(von)'이 추가되었다. 1803년 바이마르에서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프로이센 왕국 모룬겐(현재 폴란드 모롱크)에서 교사인 아버지 고트프리트 헤르더(1706-1763)와 어머니 안나 엘리자베스 헤르더(결혼 전 성 펠츠, 1717-1772) 사이에서 1744년에 태어났다.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으며, 아버지는 오르간 연주자와 초등학교 교사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헤르더는 아버지의 성경과 노래책(songbook)을 통해 스스로 공부했다. 학교 성적은 뛰어났으나 가난 때문에 대학 진학은 어려웠다.1761년, 7년 전쟁 중 러시아군 철수 시 모룬겐에 주둔하던 군의관이 헤르더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외과의사로 키우기 위해 쾨니히스베르크로 데려갔다. 1762년, 17세의 나이로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했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신학부로 옮겼다. 대학에서 당시 철학을 가르치던 임마누엘 칸트의 강의를 듣고 큰 영향을 받았다. 이때 칸트는 아직 비판철학 시기 이전이었고, 물리학부터 지리학까지 폭넓게 가르쳤는데, 헤르더는 이러한 칸트의 백과전서적인 지식에 매료된 것으로 보인다. 칸트는 이후 헤르더의 생애에 걸쳐 스승이자 친구, 때로는 라이벌로서 영향을 주었다.
칸트보다 더 깊은 영향을 준 인물은 "북방의 박사"라 불린 사상가 요한 게오르크 하만이었다. 헤르더는 안과 질환 때문에 하만의 진료소를 찾았다가 그를 알게 되었다. 독실했던 헤르더는 순수한 세속적 이성의 주장에 반박했던 하만에게 매력을 느꼈고, 그로부터 셰익스피어 문학과 데이비드 흄 철학 등을 배웠다. 하만의 영향으로 헤르더는 훗날 아내에게 "나는 이성이 너무 부족하고 특이성이 너무 많다"고 고백하기도 했다.[19] 비록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었지만, 헤르더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독일 정치 사상에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다고 평가받는다.
대학 졸업 후, 하만의 소개로 1764년 리가로 가서 루터교 목사이자 교사로 활동했다. 이 시기에 그는 첫 주요 저작인 문학 비평 관련 글들을 집필했다.
2. 2. 하만과의 만남과 영향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시절, 헤르더는 스승 임마누엘 칸트 외에도 요한 게오르크 하만과 깊은 교류를 맺었다. 하만은 당시 "북방의 박사"로 불리던 사상가로, 쾨니히스베르크 출신이었으며 순수한 세속주의적 이성의 주장에 반박하는 입장을 가졌다. 헤르더는 안 질환을 앓아 하만의 진료소에 다니면서 그를 알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하만은 헤르더의 지적인 후원자가 되었으며, 독실했던 헤르더는 하만에게 큰 매력을 느꼈다. 헤르더는 하만으로부터 셰익스피어의 문학과 데이비드 흄의 철학 등을 배웠다. 하만의 영향은 헤르더가 훗날 아내에게 "나는 이성이 너무 부족하고 특이성이 너무 많다"고 고백할 정도로 깊었다.[19] 이러한 지적 영향을 바탕으로 헤르더는 독일 정치 사상의 새로운 학파를 세웠다고 평가받는다. 이후 헤르더는 하만의 소개로 리가 대성당의 설교자 직을 얻어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게 된다.
2. 3. 리가 시절과 초기 저술 활동
1764년 루터교 목사가 된 헤르더는 리가로 가서 가르쳤다. 리가에서 그의 열정적인 교육 방식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하만이 발행하는 문예 신문에 시 비평을 기고하여 호평을 받았고, 이를 통해 헤르더의 문학 비평 능력이 알려지게 되었다.1766년부터는 본격적인 집필 활동을 시작하여 첫 주요 저작인 ''근대 독일 문학 단편''(Fragmente über die neuere deutsche Literaturde)을 출판했다. 이 책은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모세스 멘델스존, 토마스 압트(Thomas Abbt) 등이 주도했던 『최근 독일 문학에 관한 문학 서간』(Briefe, die neueste Literatur betreffendde)에 대한 비평적 견해를 담고 있으며, 이후 독일 문학 비평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저작에는 이미 역사주의적 관점과 헤르더 언어철학 및 역사철학의 기초가 나타난다.
이 문예 비평으로 헤르더는 명성을 얻었으나, 개정판에서 할레 대학교(과거 베를린 대학교) 웅변술 교수였던 크리스티안 아돌프 클로츠(Christian Adolph Klotzde)의 시를 비판한 것이 빌미가 되어 클로츠로부터 비난을 받고 논쟁에 휘말렸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비판 논총''(Kritische Wälderde)을 출판했다. 이후 발표한 ''히브리인의 고고학''(Archäologie des Hebräertumsde) 등 역사가로서의 저작들이 범신론적이라는 이유로 리가에서 성직자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비판과 더불어 프랑스 문학에 대한 지식을 넓히려는 목적으로 1769년 헤르더는 리가를 떠나 프랑스로 향했다. 배를 타고 낭트 항구에 도착하여 파리로 갔으며, 이 여정은 ''나의 1769년 여행 일기''(Journal meiner Reise im Jahr 1769de)라는 기록으로 남았고 저자로서 그의 자아 인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2. 4. 프랑스 체류와 여행
1769년, 헤르더는 리가에서의 활동 중 겪었던 크리스티안 아돌프 크로츠와의 논쟁과 자신의 범신론적 견해에 대한 비판 등으로 인해 리가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또한 프랑스 문학에 대한 지식을 넓히고자 하는 열망도 그의 결심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배를 타고 프랑스 낭트 항구로 가서 파리로 향했다.[19] 이 여정은 그의 저서 『Journal meiner Reise im Jahr 1769』에 기록되었으며, 이 경험은 작가로서 그의 자기 인식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헤르더는 프랑스 철학자들의 저서를 탐독하고, 당대의 주요 지식인이었던 드니 디드로와 장르롱 달랑베르를 직접 만나 교류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 왕자의 교양 여행에 동행해 달라는 제안을 받은 헤르더는 1770년 독일로 돌아왔다. 같은 해 스트라스부르에서 젊은 괴테를 만났다. 이 만남은 독일 문학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데, 괴테가 헤르더의 문학 비평에서 큰 영감을 받아 자신만의 독창적인 문학 스타일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문학사적으로 폭풍과 열정(Sturm und Drang|슈투름 운트 드랑de) 운동의 시작점으로 여겨진다.
1771년, 헤르더는 샤움부르크-리페 백작 빌헬름의 초청을 받아 뷔케부르크에서 수석 목사이자 궁정 설교자 직책을 맡게 되었다.
2. 5. 괴테와의 만남과 슈투름 운트 드랑

1769년 프랑스 낭트 항구로 여행을 떠났던 헤르더는 1770년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했다. 당시 그는 왕자 수행 임무를 그만두고 안과 질환 치료차 도시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스트라스부르의 학생이었던 젊은 괴테가 이미 문예 비평가로 알려져 있던 헤르더를 찾아왔다. 1771년 봄에 이루어진 이 만남은 독일 문학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괴테는 헤르더로부터 문학 비평과 새로운 문학관에 대한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문체를 발전시켰다. 이러한 흐름은 결과적으로 독일 문학의 폭풍과 열정(Sturm und Drang) 운동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헤르더는 괴테와의 만남 이후 1771년 뷔케부르크로 이동하여 샤움부르크-리페 백작 빌헬름(William, Count of Schaumburg-Lippe) 휘하에서 수석 목사이자 궁정 설교자 직책을 맡았다.
2. 6. 바이마르 시절과 만년
스트라스부르 체류 이후, 오랫동안 바라던 목사직을 샤움부르크-리페 백국(현 니더작센주)의 소도시 뷔케부르크에서 맡게 되었다. 그러나 문학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고, 이곳에서 고독한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1776년, 바이마르에서 정치가로 활동하던 괴테의 도움으로 바이마르 공국의 총감독(Generalsuperintendent)직에 임명되어 학자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 시기 헤르더의 관점은 고전주의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바이마르에서 헤르더는 1780년대에 괴테와 함께 당시 금기시되던 바루크 드 스피노자의 철학을 연구하며 독일의 저명한 학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는 훗날 스피노자 논쟁의 계기가 되었고, 현대 스피노자 연구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1784년부터 1791년에 걸쳐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인류 역사 철학 고찰''(de)을 저술했다. 이 책에서 그는 인류 역사의 발전 과정을 인간성(Humanität)과 시대정신(Zeitgeist)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1773년 5월 2일 다름슈타트에서 마리아 카롤린 플락스란트(1750-1809)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다.
이름 | 출생 연도 | 사망 연도 | 출생지 |
---|---|---|---|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 | 1774 | 1806 | 뷔케부르크 |
아우구스트 폰 헤르더 | 1776 | 1838 | 뷔케부르크 |
빌헬름 루트비히 에른스트 폰 헤르더 | 1778 | ? | ? |
카를 에밀 아델베르트 폰 헤르더 | 1779 | 1857 | 바이마르 |
루이제 슈티힐링 (née 폰 헤르더) | 1781 | 1860 | 바이마르 |
에밀 에른스트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 | 1783 | 1855 | 바이마르 |
리날도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 | 1790 | ? | 바이마르 |
헤르더는 그의 스승인 이마누엘 칸트를 비롯하여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로부터 영향을 받았다.[21] 그의 사상은 이후 헤겔, 니체, 괴테,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존 스튜어트 밀, 카를 빌헬름 프리드리히 슐레겔, 빌헬름 폰 훔볼트,[22][23] 프란츠 보아스,[24] 그리고 월터 라우셴부시[25] 등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에게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
경력 말년에 헤르더는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는데, 이는 많은 동료들의 반감을 사는 원인이 되었다.[20] 그는 프랑스 혁명에 감명을 받아 ''인간성 촉진을 위한 서간''(de, 1793-1797년)을 저술하여 역사적 사건을 인간성과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고찰했다. 이 저서는 괴테의 미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도 담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괴테, 프리드리히 폰 실러, 칸트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괴테와는 개인적인 불화도 겪게 되었다.
칸트 철학에 대한 비판 역시 그의 만년을 고립시킨 요인이었다. 헤르더는 스승이었던 칸트의 비판철학에 대한 반박으로 ''순수 이성 비판의 메타비판''(de, 1799년)과 ''칼리고네''(de, 1800년)를 저술했다. 그는 칸트 철학이 인간의 의식을 개별 능력으로 분해하고, 대상 세계를 "현상"과 "물자체"라는 비생명적인 것으로 나누며, "순수한 이성"이나 "선험적 인식"과 같은 개념은 인간 이성의 본질인 언어 문제를 간과한 단순한 "말의 남용"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인간성과 역사성을 중시하는 헤르더 철학의 입장을 잘 보여주지만, 한편으로는 칸트 철학에 대한 그의 오해와 이해 부족을 드러낸다는 지적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이후 독일 관념론이 비판적으로 검토되고 역사주의와 인간학적 관점이 중요해지면서 헤르더의 철학은 그 선구적인 역할로 재평가받고 있다.
1802년, 헤르더는 바이에른 선제후에 의해 귀족으로 서임되어 성에 '폰(von)'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문화의 중심지였던 바이마르에서 자신의 생각이 시대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친구 및 스승과의 계속되는 논쟁 속에서 고뇌의 말년을 보내다가 1803년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주요 사상
헤르더 사상의 핵심 중 하나는 언어에 대한 깊은 관심이다. 1772년 출판된 『언어 기원에 관한 논고』는 비교 언어학의 기초를 마련한 중요한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언어가 단순히 의사소통 수단을 넘어 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형성하는 핵심 요소임을 강조했으며, 프랑스 문화의 영향력에 맞서 독일어의 고유한 가치를 역설하며 "센강의 추악한 진흙을 토해내라. 독일어를 말하라, 오, 너희 독일인들이여"라고 외치기도 했다.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도 헤르더는 민족 고유의 정신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셰익스피어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제시했으며, 1773년 괴테 등과 함께 출판한 『오시안과 고대 민족의 노래에 관한 서신 교환 발췌』(Auszug aus einem Briefwechsel über Ossian und die Lieder alter Völkerde)에서는 고대 민족의 시가 지닌 원초적인 힘을 강조했다. 헤르더는 시인이 "주변 국가의 창조자이며, 그들에게 볼 세계를 주고 그들의 영혼을 손에 쥐고 그 세계로 이끈다"고 보았다. 그는 구약성경, 에다, 호메로스와 같은 고전뿐만 아니라, 고대 독일 민요와 노르드 시가 및 신화 속에서 민족 정신의 순수한 형태를 찾고자 노력했다. 또한 게오르크 포르스터가 번역한 산스크리트 희곡 『샤쿤탈라』를 접한 후에는 힌두교와 인도 문학의 풍부한 상상력에 깊은 인상을 받아 관련 글을 남기기도 했다.[45][26]
thumb 앞에 있는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동상]]
1776년 바이마르 공국의 총감독이 된 이후, 헤르더는 역사 철학 연구에 몰두하여 미완의 대작 『인류 역사 철학 고찰』(Ideen zur Philosophie der Geschichte der Menschheitde) 집필을 시작했다. 이 저작은 후대 역사주의 사상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그는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정 "시대, 지역, 전체 역사 속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느껴야 한다"고 주장하며, 객관적인 사실 나열을 넘어선 깊이 있는 공감과 해석을 강조했다. 역사가는 과거 시대를 생생하게 재현하는 "재생된 현대인"이어야 하며, 역사는 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가장 진정한 애국심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헤르더는 당시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던 독일인들에게 언어와 문화를 중심으로 한 민족 공동체 의식을 일깨우고자 노력했다. 계몽주의의 합리주의에 맞서 감정과 고유한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의 사상은 독일 낭만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27] 그는 독일 민족이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요한 요아힘 빈켈만 등이 절대시했던 그리스 예술의 우월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중세 고딕 예술과 뒤러와 같은 독일 고유의 예술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또한 독일 민요를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민중 문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헤르더는 각 민족이 고유한 언어, 문화, 역사, 풍토 속에서 독자적인 특성을 발전시킨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민족적 다양성을 긍정하며, 각 민족은 저마다의 가치 기준을 지니고 있으므로 서로 비교하거나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문화 상대주의적 관점을 제시했다. 그는 민족(Volk|폴크de) 개념과 애국심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동시에 배타적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경계하기도 했다. 그의 사상은 언어, 문화, 역사, 민족 개념 등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하며 후대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29]
3. 1. 역사주의와 문화 상대주의
thumb 앞에 있는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동상]]
1776년 바이마르 공국의 총감독이 된 후, 헤르더의 철학은 다시 고전주의로 기울었다. 그는 미완성 대작인 『인류 역사 철학 고찰』(Ideen zur Philosophie der Geschichte der Menschheit|이데엔 추어 필로조피 데어 게쉬히테 데어 멘슈하이트de, 1784-1791)과 같은 작품들을 통해 역사주의 사상의 기초를 마련했다. 헤르더는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정 시대와 장소, 그리고 전체 역사의 맥락 속으로 깊이 들어가 모든 것을 직접 느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에게 역사가는 과거를 현재처럼 생생하게 느끼고 재현하는 "재생된 현대인"이어야 했으며, 역사는 민족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고취하는 "가장 진정한 애국심의 도구"로서 과학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27]
헤르더는 당시 정치적으로 통일되지 못하고 여러 지역과 집단으로 나뉘어 있던 독일인들에게 언어와 문학을 중심으로 한 문화적 통일성과 민족 의식의 중요성을 일깨운 선구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는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이성을 중시했던 것과 달리 감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독일 낭만주의의 문을 열었다.[27] 그는 독일인들에게 자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새로운 자부심을 불어넣고자 했으며, 요한 요아힘 빈켈만이나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등이 찬양했던 그리스 예술의 절대적 우월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자신이 중세에 태어났기를 바라며, "슈바벤 황제 시대"가 독일 민족 정신의 진정한 빛으로 조명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헤르더는 독일적인 것을 고딕 양식과 동일시하며 알브레히트 뒤러와 고딕 예술 전반을 높이 평가했다. 예술뿐만 아니라 언어에서도 그는 민족적 메시지를 강조했다. 1617년 라틴어로 독일어의 가치를 역설한 마르틴 오피츠의 정신을 이어받아, 헤르더는 독일인들에게 당시까지 경시되던 독일어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것을 촉구했다. 또한 그가 광범위하게 수집한 독일 민요는 이전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민족 문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헤르더는 언어가 각 언어 공동체의 사고방식과 감정을 형성하는 틀을 제공한다고 주장한 초기 사상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언어를 "사고의 기관"이라고 불렀지만, 이것이 언어가 사고를 완전히 결정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헤르더와 그의 사상을 계승한 빌헬름 폰 훔볼트는 언어가 인간의 마음이 외부 세계를 인식하고 구별하는 표식(Merkmale|메르크말레de)을 통해 작용한다고 보았다.[28] 헤르더는 인간의 언어 기원에 대한 추측적 설명을 통해, 언어 이전의 사고보다는 언어와 활동적인 반성(Besonnenheit|베조넨하이트de)이 인간 의식의 핵심이며, 의미를 부여하려는 인간의 충동이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내재한다고 주장했다.[28] 이러한 생각은 훔볼트가 "모든 사고는 언어를 통한 사고"라고 주장하며 언어가 특정한 세계관(Weltansichten|벨트안지히텐de)을 형성한다는 사상으로 발전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헤르더는 민족(Volk) 개념과 애국심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애국심을 잃은 자는 자신과 자신 주변의 모든 세계를 잃은 것이다"라고 말하며, "어떤 의미에서 모든 인간의 완벽함은 국민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국가에는 단 하나의 계급, 즉 Volk(어리석은 무리가 아니다)가 있으며, 왕도 농부도 이 계급에 속한다"고 선언하며, 계급을 초월한 민족 공동체 개념을 제시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생각으로, '국민'이 국가 구성의 핵심 단위로 부상하는 기초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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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각 민족이 기후, 교육, 외부와의 교류, 전통, 유전 등에 의해 구별되는 고유한 특성을 지닌다고 보았다. 신의 섭리가 "언어, 성향, 성격뿐만 아니라 숲과 산, 바다와 사막, 강과 기후에 따라 국민성을 놀랍게 분리했다"고 찬양하며, 각 민족의 다양성을 긍정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문화 상대주의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헤르더는 "조용한 기쁨으로 자신, 아내, 아이를 사랑하고 자신의 부족의 제한된 활동에 자신의 삶처럼 열정을 쏟는 야만인은 전체 종의 그림자에 도취된 그 교양 있는 그림자보다 더 실제적인 존재"라고 쓰며, 보편주의보다는 개별 민족 공동체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각 국민성은 중력의 중심처럼 행복의 중심을 스스로 가지고 있다"며 각 문화의 고유한 가치 기준을 인정했고, "모든 국민은 다른 국민과의 비교와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완벽함의 기준을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문화 간의 우열 비교를 거부했다. 시, 외모, 취향, 관습, 언어, 종교 등 모든 면에서 민족마다 고유한 특성을 지닌다고 본 것이다.
우크라이나 여행 후 작성한 일기(Journal meiner Reise im Jahre 1769|주르날 마이너 라이제 임 야레 1769de)에서 헤르더는 서유럽이 기독교를 거부하고 쇠퇴하는 반면, 동유럽 민족들은 종교와 이상을 보존하여 미래 유럽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특히 우크라이나에 대해 "아름다운 하늘, 명랑한 기질, 음악적 재능, 풍요로운 토양 등… 언젠가는 그곳에서 영향력이 전 세계에 퍼질 교양 있는 국민이 깨어날 것이다"라고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반면, 헝가리 민족이 주변 슬라브 민족에게 동화되어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은 헝가리에서 큰 반발을 샀으며 오늘날까지도 회자된다.[30] 그는 마르틴 루터가 민족 교회를 세우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독일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고유한 민족성을 잃은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의 애국심은 때때로 국가 범신론에 가까워져, "글, 제조업, 제도를 통해 독일 영토의 통일을 증진하려는 자는 영광과 감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며 영토 통일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또한 독일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며 다음과 같이 외쳤다. "그러나 이제! 다시 외치노라, 나의 독일 형제들이여! 이제야! 모든 진정한 민족 사상의 잔재가 마지막이자 가속화된 추진력으로 망각의 심연으로 굴러떨어지고 있다. 지난 세기 동안 우리는 조국과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해 수치심을 느껴왔다."
그의 저서 『인류 철학과 역사에 대한 사상』에서는 "영국과 독일을 비교해 보라. 영국인은 독일인이며, 심지어 최근에도 독일인들이 가장 위대한 일들에서 영국인들을 이끌어왔다"고 쓰기도 했다.
절대주의와 프로이센적 국가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범게르만적인 민족 정신을 강조했던 헤르더는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감정과 이성, 경험과 지성, 원시적 진리와 파생적 진리의 조화를 추구했으며, 이러한 조화에 대한 탐구는 당시 독일 지성계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그러나 헤르더는 자신의 민족 이론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성을 인지하고 경계했다. 그는 민족주의가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우려하며 구체적인 경고를 남겼다. 그는 독일 내 유대인들이 독일인으로서 완전한 권리와 의무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세계는 수세기 동안 유대인에게 가해진 박해에 대해 빚을 지고 있으며, 이 빚은 유대인들이 고대 조국 이스라엘에서 정치적 주권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갚아야 한다고 역설했다.[31] 또한 그는 엄격한 과학적 인종주의를 거부하며 "인간 형태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온 지구에는 하나의 종류의 인간만이 존재한다"고 명확히 밝혔다. 그는 "국가적 영광은 속이는 유혹자이다. 어느 정도 높이에 이르면, 철의 띠로 머리를 휘감는다. 그 안에 갇힌 자는 안개 속에서 자신의 모습만을 본다. 그는 어떤 외부적인 인상에도 감수성이 없다"고 선언하며 맹목적인 민족주의를 비판했다. 안타깝게도 후대의 많은 이들이 헤르더의 민족 사상에 영향을 받았지만, 그가 제시했던 이러한 경고와 제한 조건에는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헤르더는 자신의 민족 개념이 민주주의와 각 민족 정체성의 자유로운 자기표현을 증진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왕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그는 이성을 언어라는 구체적인 맥락과 분리시킨 스승 이마누엘 칸트의 철학에 비판적이었다. 헤르더는 이성 자체가 독립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이성은 언어에 의존하는 추론 과정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보았다.[32]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에 대한 메타비판(Metakritik zur Kritik der reinen Vernunft|메타크리티크 추어 크리티크 데어 라이넨 페어눈프트de, 1799)과 『칼리고네』(Kalligone|칼리고네de, 1800)를 저술하여 칸트 철학이 인간 의식을 개별 능력으로 분해하고, 대상 세계를 "현상"과 "물자체"로 나누며, "순수한 이성"이나 "선험적 인식"과 같은 개념은 인간 이성의 본질, 특히 언어와의 관계를 간과한 "말의 남용"이라고 비판했다. 비록 이러한 저술에서 칸트 철학에 대한 오해나 이해 부족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역사성과 인간성을 중시한 헤르더의 철학은 19세기 이후 독일 관념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함께 역사주의 및 철학적 인간학의 선구적인 입장으로 재평가받게 되었다.
그는 민족(Volk) 개념을 널리 알리기 위해 편지를 출판하고 민요를 수집했는데, 후자는 1773년 『그들의 노래 속 민족의 목소리』(Stimmen der Völker in ihren Liedern|슈티멘 데어 푈커 인 이렌 리데른de)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민요집은 후에 아힘 폰 아르님과 클레멘스 브렌타노가 『데스 크나벤 분더호른』(Des Knaben Wunderhorn|데스 크나벤 분더호른de)을 편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헤르더는 문화의 개성뿐만 아니라 문화 내 '개인'의 개성 또한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토마스 아브트의 저술에 관하여』(Über Thomas Abbt's Schriften|위버 토마스 압츠 슈리프텐de, 1768)와 『인간 영혼의 인식과 감각에 관하여』(Vom Erkennen und Empfinden der menschlichen Seele|폼 에어케넨 운트 엠핀덴 데어 멘슐리헨 젤레de, 1778) 등 초기 저작에서부터 개인의 독자적인 형성과 감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인간의 영혼은 정신의 영역에서 개인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형성에 따라 감각하고, 정신 기관의 힘에 따라 생각한다"고 말하며 인간 마음의 개별성을 역설했다.[33]
일부 과학사학자들은 헤르더를 진화 사상의 역사에 기여한 원시 진화론적 사상가로 보기도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34][35][36] 지구 생명체의 역사에 대해 헤르더는 자연사적 관점과 형이상학(종교적) 관점이 혼재된 복합적인 견해를 제시했으며,[35] 존재의 대사슬 개념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6] 헨리 페어필드 오스본은 헤르더가 "하등 생명체에서 고등 생명체로의 변형, 하등 형태에서 고등 형태로의 지속적인 변형, 그리고 완전성의 법칙을 옹호했다"고 평가했지만,[37] 전기 작가 울프 쾨프케는 "동물에서 인간 종으로의 생물학적 진화는 그의 사고 밖에 있었으며, 여전히 신적 창조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하며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38]
3. 2. 언어 철학
헤르더는 이마누엘 칸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에게 영향을 받았으며,[21] 헤겔, 니체, 괴테, 빌헬름 폰 훔볼트 등 많은 후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22][23][24][25] 그의 언어 철학은 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772년, 헤르더는 『언어 기원에 관한 논고』를 출판하여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비교 언어학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 책에서 그는 요한 페터 쥐스밀히의 언어 신탁설, 즉 언어가 신에게서 기원했다는 주장을 비판하고, 언어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생각이었으며, 빌헬름 폰 훔볼트를 비롯한 후대의 언어학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또한 프랑스 문화의 영향력을 비판하며 "센강의 추악한 진흙을 토해내라. 독일어를 말하라, 오, 너희 독일인들이여"라고 외치며 독일어 사용과 독일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고취하고자 했다. 이는 17세기 마르틴 오피츠가 라틴어로 독일어를 옹호했던 흐름을 잇는 것이었다.
헤르더는 언어가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를 넘어, 각 민족 공동체의 사고방식과 감정을 형성하는 틀이라고 보았다. 그는 언어를 "사고의 기관"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언어가 사고를 완전히 결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언어는 구별되는 표식(de)을 통해 인간이 외부 세계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모세스 멘델스존과 토마스 아브트의 저작에서 영감을 받았다. 헤르더에게 인간의 고유한 능력인 활동적인 반성(de)과 언어는 인간 의식의 핵심이며,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근본적인 방식이었다.[28]
이러한 헤르더의 언어관은 빌헬름 폰 훔볼트에게 계승되어, 언어가 각기 다른 세계관(de)을 반영하고 형성한다는 이론으로 발전했다. 헤르더의 사상은 후대의 언어 상대성(사피어-워프 가설) 논의나, 프란츠 보아스의 문화 연구 방법론인 역사적 특수주의, 그리고 델 하임즈의 민족지학적 언어 연구 등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헤르더는 언어뿐만 아니라 시(詩) 역시 민족 정신을 형성하고 표현하는 중요한 매체로 보았다. 그는 1773년 괴테, 유스투스 뫼저 등과 함께 출판한 『오시안과 고대 민족의 노래에 관한 서신 교환 발췌』(de)에서 "시인은 주변 국가의 창조자이며, 그들에게 볼 세계를 주고 그들의 영혼을 손에 쥐고 그 세계로 이끈다"고 주장했다. 그는 문명화 이전 시대의 시가 가장 순수하고 강력한 힘을 지닌다고 생각했으며, 구약성경, 에다, 호메로스의 작품뿐 아니라 고대 독일 민요, 노르드 시가와 신화 등에서 이러한 원초적인 힘을 찾고자 했다. 그는 또한 게오르크 포르스터가 1791년 번역한 산스크리트 희곡 『샤쿤탈라』를 통해 힌두교와 인도 문학의 종교적 이미지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여러 글을 남겼다.[45][26]
헤르더는 언어와 문화를 민족(de)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보았다.[29] 그는 민속, 무용, 음악, 예술 등 다양한 문화적 표현들이 민족 정체성을 이루며, 이러한 전통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야곱과 빌헬름 그림 형제가 독일 민화를 수집하고 연구하는 데 큰 영감을 주었다. 헤르더 자신도 민요를 수집하여 1773년 『그들의 노래 속 민족의 목소리』(de)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는데, 이는 당시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민중 문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민요집은 후대 낭만주의 시인 아힘 폰 아르님과 클레멘스 폰 브렌타노가 『데스 크나벤 운더호른』(de)을 편찬할 때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그는 국민성(de)과 애국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애국심을 잃은 자는 자신과 자신 주변의 모든 세계를 잃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민족을 왕족과 평민을 아우르는 하나의 공동체(de)로 보았으며, 각 민족은 언어, 기후, 역사, 전통 등 고유한 환경 속에서 독자적인 특성을 발전시킨다고 생각했다. 그는 각 민족이 지닌 고유한 가치를 존중해야 하며, 다른 민족과 단순 비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를 여행한 후에는 서유럽의 쇠퇴와 달리 동유럽 민족들이 지닌 잠재력, 특히 우크라이나 민족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는 예측을 남기기도 했다.[30]
헤르더는 스승 이마누엘 칸트의 철학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칸트가 이성을 언어와 분리하여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한 점에 동의하지 않았다. 헤르더에게 이성은 언어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추론 과정이며, 따라서 이성 자체도 언어의 맥락 속에서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32]
헤르더는 민족 개념을 강조했지만, 이것이 배타적인 민족주의나 인종 이론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인간 형태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온 지구에는 하나의 종류의 인간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인류의 보편성을 강조했다. 또한 독일 내 유대인들이 완전한 권리를 누려야 하며, 과거의 박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유대인들의 이스라엘에서의 정치적 주권 회복 노력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31] 시대를 앞서나간 관용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국가적 영광은 속이는 유혹자"라며 맹목적인 애국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으며, 자신의 민족 개념이 민주주의와 각 개인 및 민족의 자유로운 자기표현을 증진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믿었다.
3. 3. 민족주의와 민족 정신
19세기까지 독일인들은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게르만어파 언어를 사용하는 여러 지역과 집단으로 나뉘어 살았다. 헤르더는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 언어와 문학을 중심으로 독일 문화의 통일과 독일 민족 의식의 기초를 다진 초기 지식인 중 한 명이었다.[27] 그는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중시했던 합리성보다는 감정에 호소하며 독일 낭만주의의 흐름 속에 자리 잡았다.[27]
헤르더는 언어가 각 언어 공동체가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의 틀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고 주장한 선구자 중 하나였다. 그는 언어를 "사고의 기관"으로 보았으나, 이것이 언어가 사고를 완전히 결정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헤르더와 그의 사상을 계승한 빌헬름 폰 훔볼트는 언어가 인간의 마음속에 외부 세계를 표상하고 구별하는 도구라고 보았다.[28] 헤르더는 1772년 『언어 기원에 관한 논고』를 통해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비교 언어학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이전에는 프랑스 문화의 영향력을 비판하며 "센강의 추악한 진흙을 토해내라. 독일어를 말하라, 오, 너희 독일인들이여"라고 외치기도 했다. 그는 마르틴 오피츠 이래 독일 작가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독일어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것을 촉구했다.
헤르더는 국민성과 애국심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애국심을 잃은 자는 자신과 자신 주변의 모든 세계를 잃은 것이다"라고 가르치며, "어떤 의미에서 모든 인간의 완벽함은 국민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국가에는 왕부터 농부까지 모두 포함되는 단 하나의 계급, 즉 'Volk'(어리석은 무리가 아닌 공동체로서의 민족)만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개념으로, 계급 없는 국가 개념의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헤르더에게 국가는 기후, 교육, 외부와의 교류, 전통, 유전 등에 의해 구별되는 개별적이고 분리된 존재였다. 그는 "각 국민성은 중력의 중심처럼 행복의 중심을 스스로 가지고 있다"며, 각 민족이 다른 민족과 비교할 필요 없이 고유한 완벽함의 기준을 지닌다고 보았다.
이러한 민족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헤르더는 독일 고유의 문화유산에 주목했다. 그는 셰익스피어에 관한 에세이와 『오시안과 고대 민족의 노래에 관한 서신 교환 발췌』(1773) 등을 통해 고대 민족의 시가에 나타난 순수하고 강력한 힘을 강조했다. 그는 구약성경, 에다, 호메로스뿐만 아니라 고대 독일 민요와 노르드 시가 및 신화에서 이러한 원형적 힘을 찾고자 했다. 그의 광범위한 민요 수집은 1773년 ''그들의 노래 속 민족의 목소리''(Stimmen der Völker in ihren Liedernde)로 출판되어 독일 내에서 민속에 대한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켰고, 이는 그림 형제의 민화 수집에도 영감을 주었다. 예술 분야에서도 그는 요한 요아힘 빈켈만 등이 칭송한 그리스 예술의 우월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독일적인 고딕 양식과 뒤러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독일 영토의 통일을 촉구하며 애국심을 강조했다.
헤르더는 다른 민족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 우크라이나를 여행한 후 쓴 일기(Journal meiner Reise im Jahre 1769de)에서는 서유럽의 쇠퇴와 달리 동유럽 국가들이 종교와 이상을 지켜 미래 유럽의 강국이 될 것이라 예측하며, 특히 우크라이나가 "아름다운 하늘, 명랑한 기질, 음악적 재능, 풍요로운 토양 등… 언젠가는 그곳에서 영향력이 전 세계에 퍼질 교양 있는 국민이 깨어날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반면, 헝가리 민족이 주변 슬라브 민족에게 동화되어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은 헝가리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30]
헤르더는 자신의 민족 이론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성을 인지하고 경계했다. 그는 "국가적 영광은 속이는 유혹자이다"라고 경고하며, 극단적인 민족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촉구했다. 또한, 엄격한 인종 이론을 거부하며 "인간 형태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온 지구에는 하나의 종류의 인간만이 존재한다"고 강조하여 보편적인 인류애를 드러냈다. 특히 유대인 문제에 있어서는 그들이 독일인으로서 완전한 권리와 의무를 누려야 하며, 과거의 박해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인정하고 그들의 고대 조국에서의 정치적 주권 회복 노력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1]
정치적으로 헤르더는 절대주의와 프로이센 민족주의를 비판했으며,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다. 이는 당시 왕족들에게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입장이었다. 그는 또한 칸트의 철학이 이성을 언어의 맥락과 분리시켰다고 비판하며, 이성은 언어에 의존하는 추론 과정이라고 보았다.[32]
헤르더는 민족 공동체뿐만 아니라 개인의 개성 또한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토마스 아브트의 저술에 관하여''(1768)와 ''인간 영혼의 인식과 감각에 관하여''(1778) 등에서 문화적 개성뿐 아니라 개인의 고유한 정신과 감각을 강조하며, "인간의 영혼은 정신의 영역에서 개인이다"라고 말했다.[33]
헤르더의 사상은 헤겔, 니체, 괴테, 빌헬름 폰 훔볼트, 프란츠 보아스 등 후대의 많은 사상가, 언어학자, 인류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21][22][23][24] 그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통찰은 사피어-워프 가설이나 역사적 특수주의와 같은 후대 이론과 연결되기도 한다.[29] 그러나 그의 민족 개념과 애국심 강조는 후대에 민족주의적 해석의 여지를 남기기도 했으며, 그가 경고했던 극단적인 민족주의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3. 4. 문학과 예술론
헤르더는 그의 지도교수인 이마누엘 칸트뿐 아니라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영향을 받았다.[21] 그는 다시 헤겔, 니체, 괴테,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존 스튜어트 밀, 카를 빌헬름 프리드리히 슐레겔, 빌헬름 폰 훔볼트,[22][23] 프란츠 보아스,[24] 그리고 월터 라우셴부시[25] 등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1772년, 헤르더는 『언어 기원에 관한 논고』를 출판하여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비교 언어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그는 이전에 프랑스를 비판하며 "센강의 추악한 진흙을 토해내라. 독일어를 말하라, 오, 너희 독일인들이여"라고 했던 것보다 더 나아가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헤르더는 셰익스피어에 관한 중요한 에세이와 1773년 괴테와 유스투스 뫼저의 글과 함께 출판된 『오시안과 고대 민족의 노래에 관한 서신 교환 발췌』(Auszug aus einem Briefwechsel über Ossian und die Lieder alter Völkerdeu)를 저술했다. 헤르더는 "시인은 주변 국가의 창조자이며, 그들에게 볼 세계를 주고 그들의 영혼을 손에 쥐고 그 세계로 이끈다"고 보았다. 그에게 시는 구약성경, 에다, 그리고 호메로스에서 보여지듯 문명화되기 전 국가에서 가장 순수하고 강력한 힘을 지녔으며, 그는 고대 독일 민요와 노르드 시가 및 신화에서 그러한 미덕을 찾으려고 했다. 게오르크 포르스터가 1791년에 번역한 산스크리트 희곡 『샤쿤탈라』 이후, 헤르더는 힌두교와 인도 문학의 종교적 이미지에 긍정적인 영향을 받아 이 주제에 대한 여러 에세이와 1803년판 『샤쿤탈라』의 서문을 썼다.[45][26]
1776년 총감독이 된 후, 헤르더의 철학은 다시 고전주의로 기울었고, 그는 미완성 작품인 『인류 철학사 개요』와 같은 작품들을 제작했는데, 이는 대부분 역사 사상 학파의 기원이 되었다. 헤르더의 철학은 깊이 주관적인 전환을 보였고, 인간 발달에 대한 물리적, 역사적 환경의 영향을 강조하며 "시대, 지역, 전체 역사 속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느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역사가는 과거의 "재생된 현대인"이어야 하며, 역사는 "가장 진정한 애국심의 도구"로서 과학이 되어야 한다.
헤르더는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중시한 합리성보다 감정에 대한 호소를 강조하며 독일 낭만주의에 영향을 미쳤다.[27] 그는 독일인들에게 그들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자부심을 주었고, 요한 요아힘 빈켈만과 고틀리프 에프라임 레싱 등이 칭송했던 그리스 예술(''그리스 부흥'')에 부여된 우월한 지위를 재고했다. 그는 자신이 중세에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고, "슈바벤 황제 시대"가 "독일 사고 방식에 따라 진정한 빛으로 제시될 자격이 있는지" 숙고했다. 헤르더는 독일 정신을 고딕 양식과 동일시했고 뒤러와 모든 고딕 양식을 선호했다.
예술 분야와 마찬가지로 그는 언어 분야에서도 민족적 메시지를 선포했다. 그는 1617년 라틴어로 『아리스타르쿠스 또는 독일어 경멸에 관하여』(Aristarchus, sive de contemptu linguae Teutonicaelat)를 저술한 마르틴 오피츠와 같은 독일 작가들의 계보를 이어받아, 그때까지 경멸받았던 독일어에 자부심을 가지라고 촉구했다. 헤르더의 광범위한 민요 모음은 독일에서 그때까지 무시되었던 주제에 대한 열풍을 일으켰다. 그는 민중(Volk|폴크deu) 개념을 홍보하기 위해 편지를 출판하고 민요를 수집했다. 후자는 1773년에 『그들의 노래 속 민족의 목소리』(Stimmen der Völker in ihren Liederndeu)로 출판되었다. 시인 아힘 폰 아르님과 클레멘스 폰 브렌타노는 나중에 『데스 크나벤 운더호른』(Des Knaben Wunderhorndeu)의 표본으로 이 책을 사용했다.
헤르더는 언어가 각 언어 공동체가 생각하고 느끼는 틀과 패턴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고 주장한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었다. 헤르더에게 언어는 "사고의 기관"이었지만, 이것이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오히려 언어는 구별되는 표식(Merkmale|메르크말레deu)을 통해 인간의 마음속에 외부 세계를 적용하는 것이었다. 헤르더는 자신의 주장을 제시하면서 모세스 멘델스존과 토마스 아브트의 작품에서 나온 예를 재구성했다. 그는 인간의 활동적인 반성(Besonnenheit|베조넨하이트deu)과 언어가 인간 의식에 지속되며, 의미를 부여하려는 충동이 인류에게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28] 이러한 헤르더의 사상은 빌헬름 폰 훔볼트에게 이어져, 언어가 특정한 세계관(Weltansichten|벨탄지히텐deu)을 형성한다는 생각으로 발전했다.
헤르더는 또한 개인의 개성(Individualität|인디비두알리테트deu)이라는 이상을 육성했다. 그는 초기부터 예를 들어 그의 『인류 형성을 위한 역사 철학』(1774)에서 문화의 개성을 옹호했지만, 예를 들어 그의 『토마스 아브트의 저술에 관하여』(1768)와 『인간 영혼의 인식과 감각에 관하여』(1778)에서 문화 내 '개인'의 개성도 옹호했다. 『토마스 아브트의 저술에 관하여』에서 헤르더는 "인간의 영혼은 정신의 영역에서 개인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형성에 따라 감각하고, 정신 기관의 힘에 따라 생각한다. ... 나의 긴 우화는 인간의 마음을 개별적인 현상으로, 우리의 눈을 사로잡을 만한 희귀한 것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한다면 성공한 것이다"라고 말했다.[33]
헤르더는 이성을 언어의 맥락 안에 두지 않은 칸트의 철학과도 의견을 달리했다. 헤르더는 이성 자체가 비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성은 추론 과정으로서만 존재하며, 이 과정은 언어에 의존적이기 때문이다.[32] 그는 또한 폭풍과 격정 운동으로부터 돌아서서 셰익스피어와 호머의 시로 돌아갔다.
헤르더는 일부 과학사학자들에 의해 원시 진화론적 사상가로 묘사되었지만, 다른 학자들은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34][35][36] 지구상의 생명 역사와 관련하여 헤르더는 구분하고 해석하기 어려운 자연주의적이고 형이상학적 (종교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했다.[35] 그는 존재의 대사슬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6] 그의 저서 『그리스인들로부터 다윈까지』에서 헨리 페어필드 오스본은 헤르더가 생명의 변형과 완전성의 법칙을 옹호했다고 썼지만,[37] 전기 작가 울프 쾨프케는 헤르더가 여전히 신적 창조의 영향을 받았으며 생물학적 진화는 그의 사고 밖에 있었다고 지적하며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38]
4. 영향과 유산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는 역사, 철학, 신학, 문학 등 다방면에 걸쳐 깊은 영향을 남겼다. 그의 사상은 특히 역사주의와 문화 상대주의의 발전에 중요한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각 시대와 문화가 지닌 고유한 가치와 정신(Volksgeist)을 강조하며, 보편적인 이성보다는 구체적인 역사와 언어 속에서 인간 정신이 발현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낭만주의 운동에 큰 영감을 주었으며, 후대의 역사학, 문화 인류학, 사회학 등 여러 학문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헤르더의 언어 철학은 언어가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사고와 세계 인식의 틀을 형성하는 근본적인 요소임을 강조했다. 이는 훔볼트를 비롯한 후대 언어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언어 상대성 이론의 사상적 뿌리가 되기도 했다.
문학 분야에서도 헤르더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질풍노도 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으며, 민요와 민속 문학의 가치를 재발견하여 독일 문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괴테와의 초기 교류는 괴테의 문학 세계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비록 그의 사상 중 일부, 특히 민족 정신 개념은 후대에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며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그의 근본적인 문제의식, 즉 문화의 다양성과 역사적 특수성을 존중하려는 태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칸트의 비판철학에 대한 그의 비판은 당대에는 큰 반향을 얻지 못했을지라도, 이후 독일 관념론에 대한 반성과 철학적 인간학의 발전에 영향을 미친 선구적인 시도로 재평가받고 있다.
4. 1. 비판과 논란
헤르더는 1784년부터 1791년까지 대작 『인류 역사 철학 고찰』을 저술하여 인류 역사의 발전 과정을 "인간성"과 "시대 정신"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설명했다. 또한 프랑스 혁명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인간성 촉진을 위한 서간』(1793-95년)을 발표하며, 역사적 사건들을 인간성과 시대 정신이라는 자신의 독자적인 관점에서 고찰했다. 이러한 저작들은 고전주의 문학에서 나타나는 괴테의 미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담고 있었기에, 괴테 본인을 비롯하여 프리드리히 실러, 칸트 등 당대의 주요 지식인들로부터 혹평을 받기도 했다.이에 대한 반박으로 헤르더는 당시 독일 철학계를 주도하던 자신의 스승 칸트의 비판철학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저서들을 출간했다. 대표적으로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을 재비판한 『순수 이성 비판의 메타비판』(1799년)과 『칼리고네』(1800년)가 있다. 헤르더는 이 책들에서 칸트 철학이 인간의 의식을 개별적인 능력들로 분해하고,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를 생명력 없는 "현상"과 "물자체"로 양분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칸트가 제시한 "순수한 이성"이나 "선험적 인식"과 같은 개념들이 인간 이성의 본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말의 남용"에 불과하며, 특히 칸트 철학이 인간 이성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언어의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고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이러한 헤르더의 비판은 인간의 삶과 역사를 중시하는 그의 철학적 입장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물론, 일각에서는 헤르더가 칸트 철학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거나 오해한 측면이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이후 독일 관념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이루어지고 역사주의와 인간학적 관점이 중요하게 부상하면서, 헤르더의 철학은 시대를 앞서간 선구적인 작업으로 재평가받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문화의 중심지였던 바이마르에서 활동했지만, 헤르더는 자신의 생각이 동시대인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한때 가까웠던 친구나 스승과도 격렬한 논쟁을 벌여야 하는 상황 속에서 깊은 고뇌를 겪으며 말년을 보냈다. 그는 결국 1803년,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5. 저작
연도 | 원제 (한국어 제목) | 비고 |
---|---|---|
1762 | Gesang an Cyrus, den Enkel des Astyagesde (아스티아게스의 손자 키루스에게 바치는 노래) | |
1763–64 | Essay on Beingde (존재에 관한 에세이) | [39] |
1764 | Über den Fleiß in mehreren gelehrten Sprachende (여러 학문 언어에 대한 근면성에 관하여) | |
1764 | Abhandlung über die Odede (서정시에 관한 논문) | [40] |
1765 | Wie die Philosophie zum Besten des Volkes allgemeiner und nützlicher werden kannde (철학이 대중의 이익을 위해 어떻게 더 보편적이고 유용해질 수 있는가) | [41] |
1767–68 | Über die neuere deutsche Litteratur. Fragmentede (최근 독일 문학에 대한 단편들) | [42] |
1768 | Über Thomas Abbts Schriftende (토마스 아브트의 저술에 관하여) | |
1769– | Kritische Wälder, oder Betrachtungen, die Wissenschaft und Kunst des Schönen betreffendde (비판적 숲, 또는 아름다움의 과학과 예술에 대한 성찰) | |
1769 | Journal meiner Reise im Jahr 1769de (1769년 항해 일기) | 1846년 최초 출판 |
1772 | Abhandlung über den Ursprung der Sprachede (언어의 기원에 관한 논문) | [43] |
1773 | Auszug aus einem Briefwechsel über Ossian und die Lieder alter Völkerde (오시안과 고대 민족의 노래에 관한 서신 모음) | 제임스 맥퍼슨 관련 |
1773 | Von deutscher Art und Kunst. Einige fliegende Blätterde (독일의 성격과 예술) | 괴테와 공저, 폭풍과 열정 운동의 선언문 |
1774 | Auch eine Philosophie der Geschichte zur Bildung der Menschheitde (인류 형성을 위한 또 다른 역사 철학) | [41] |
1774–76 | Älteste Urkunde des Menschengeschlechtsde (인류 최고의 문서) | |
1776 | Nachricht von Ulrich von Huttende (울리히 폰 후텐에 관한 에세이) | [44] |
1777 | Von der Ähnlichkeit der mittlern englischen und deutschen Dichtkunstde (중세 영어와 독일 시의 유사성에 관하여) | |
1778 | Plastik: Einige Wahrnehmungen über Form und Gestalt aus Pygmalions bildendem Traumede (조각: 피그말리온의 창조적 꿈으로부터 본 형태와 형식에 대한 몇 가지 관찰) | |
1778 | Vom Erkennen und Empfinden der menschlichen Seelede (인간 영혼의 인식과 감각에 관하여) | |
1778 | Vom Einfluß der Dichtkunst auf die Sitten der Völker in alten und neuen Zeitende (고대와 현대 시대에 시적 예술이 민족의 윤리에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 | |
1778–79 | Volksliederde (민요) | 1807년 제2판 제목은 Stimmen der Völker in Liedernde (민요 속의 민중의 목소리) |
1780 | Vom Einfluss der Regierung auf die Wissenschaften und der Wissenschaften auf die Regierungde (정부가 과학에 미치는 영향과 과학이 정부에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 | |
1780–81 | Briefe, das Studium der Theologie betreffendde (신학 연구에 관한 서신) | |
1781 | Vom Einfluss der schönen Künste auf die höheren Wissenschaftende (고등 과학에서 아름다움의 영향에 관하여) | |
1782–83 | Vom Geist der Ebräischen Poesie. Eine Anleitung für die Liebhaber derselben und der ältesten Geschichte des menschlichen Geistesde (히브리 시의 정신에 관하여. 동일한 것과 인간 정신의 가장 오래된 역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 | |
1787 | Gott. Einige Gesprächede (신. 몇몇 대화) | 스피노자의 체계와 샤프츠베리의 자연 찬가에 관한 대화 |
1787 | Orientalische Dialogende (동양 대화) | |
1784–91 | Ideen zur Philosophie der Geschichte der Menschheitde (인류 역사 철학에 대한 생각) | |
1785–97 | Zerstreute Blätterde (흩어진 잎들) | |
1791–97 | Briefe zur Beförderung der Humanitätde (인류의 발전을 위한 서한) | 출판 연도에 대해 다양한 설 존재 (1793–97 등) |
1792 | Über einige Brahmanende (몇몇 브라만에 대한 생각) | [45] |
1792 | Zerstreute Blätterde (흩어진 잎들) | [45] (1785-97년 판과 다른 내용 또는 개정판일 수 있음) |
1794–98 | Christliche Schriftende (기독교 저술) | 5권 |
1795–96 | Terpsichorela (테르프시코레) | 라틴 시인 야코프 발데의 번역 및 주석 |
1797 | Von Gottes Sohn der Welt Heiland. Nach Johannes Evangeliumde (요한복음에 따른 하나님의 아들과 세상의 구세주에 관하여) | |
1798 | Persepolitanische Briefede (퍼르세폴리스 서한) | 페르시아 건축, 역사 및 종교에 대한 단편들 |
1798 | Luthers Katechismus, mit einer katechetischen Einleitung für die Schulende (루터의 교리 문답, 학교 사용을 위한 교리 문답 지침과 함께) | |
1799 | Verstand und Erfahrung. Eine Metakritik zur Kritik der reinen Vernunft. Teil I. (Teil II, Vernunft und Sprache.)de (이해와 경험. 순수 이성 비판에 대한 메타비판. 제1부. (제2부, 이성과 언어.)) | |
1800 | Kalligonede (칼리고네) | |
1801–03 | Adrastea: Begebenheiten und Charaktere des achtzehnten Jahrhundertsde (아드라스테아: 18세기의 사건과 인물) | 6권 [46][47] |
1805 | Der Cidde (시드) | 스페인 서사시 엘 시드의 노래의 자유 번역 (사후 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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